일단 ‘보고서’라고 하는 말 자체가 이미 애매하다.
회사에 들어가면 보고서, 제안서, 기획서 등 문서의 목적과 형태에 따라
지칭하는 말도 다양한데 ‘퉁쳐서’ 보고서라고 하는 이 문서를 잘 쓰기란 쉽지 않다.
문서를 작성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인 이유도 분명히 있을테지만
그 회사의 스타일이 무엇인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 분(?)의 스타일이 무엇인지
나도 모르고 그 분도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애매모호한 경우를 제외하고
그냥 우리가 보고서, 즉 문서를 쓸 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유를
간단하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백지에서 시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문서든 백지에서 시작하는 것은 굉장한 부담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굳이 백지에서 시작하는 게 불필요하고
때로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이전에 누군가가 써 놓은 보고서를 화면에 띄워놓고
다른 부분만 바꿀 요량으로 덮어쓰기를 시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데 내가 참고랍시고 켜놓은 그 문서는
사실 지금 내가 쓰려는 문서와 하나도 비슷하지 않거나
오히려 켜놓은 그 문서가 기준이 되어 버려서,
조금만 달라져도 ‘틀린건가?’라고 생각되는 자기검열때문에
시간이 더 걸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정작 내 보고서가 아닌 그 문서를 읽고 있는 통에
내가 새롭게 써야되는 문장은 정말이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게된다.
그리고 가장 최악은,
참고하려고 띄워놓은 그 문서 내용대로 쫓아 쓰느라
정작 나 자신도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건지 모르는 경우가 생기고
그러다보면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아 끙끙대느라 시간을 다 소비하기 일쑤다.
백지에서 시작하라. 백지에서 시작하는 건 트레이닝이다.
하고자 하는 내용이 많고 적음에 따라, 설득해야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에 따라,
하고자하는 내용이 무거운지, 가벼운지, 돈이 많이 들어가는 일인지,
적게 시도할 수 있는 일인지에 따라
디자인 하나 조차 달라져야 하는 게 문서에 의한 설득이다.
특히 마케팅에서는 더 그렇다.
“우리 회사는 문서 스타일이 정해져 있어요” 라고 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처음에는 백지에서 그 문서 스타일 그대로 만들어 보는 게 좋다.
그래야 왜 그 포맷인지 이해할 수 있고
나아가 그 포맷의 어떤 부분이 변경되었으면 좋겠는지
어떤 부분이 불편한지 알 수 있다.
포맷까지 그리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안에 있는 내용이라도 다 지우고 시작하자.
백지에서 시작하는 것은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아직 정리되고 정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지를 채워가면서 내 머릿속도 정리되어야 한다.
이미 채워진 수 많은 글들이 내 머리에 박히면
나는 다른 생각을 전혀 할 수 없게 된다.
쉽게 쓸 수 있어야 한다.
용어에 익숙해지면 쉬운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용어를 남발해서 쓰거나 용어의 미세한 차이만 공부한다면
쉽게 쓸 수 있는 것도 어렵게 쓰게 되는 이상한 버릇이 깃든다.
어렵게 쓰게 되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용어 +서술어의 문제다.
용어에만 익숙하게 되면 (말할 때는 안그런데) 보고서 문장에서는 서술어까지 바뀐다.
서술어가 왠지 그게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높아짐으로 인해서’, ‘상승했기 때문에’ 정도의 얘기도
‘제고함에 따라?’ 아니지, ‘제고됨에 따라?’이런 식으로
서술어, 접속어를 용어에 맞게 변경하려는 노력을 한다.
그리고 심지어 그게 익숙해진다.
물론 저런 용어들, 그리고 서술어들이 꽤나 나의 전문성을 드러내주는 건 맞다.
그리고 우리 회사의 누구도 그러한 서술어, 용어를 썼다고 해서
문장이 이상하다고 타박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얘기하고 싶은건,
내가 보고서를 쓰면서 그런 하나 하나에 집중하는 통에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내가 전달해야 할 이야기가
명확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진다는 것이다.
전문용어와 그에 따르는 소위 있어보이는 서술어를 가만히 보면,
직관적이지 않고 두루뭉실하게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내가 보고서를 쓰면서도,
순간 순간 나도 모르게 강하게 주장할 것들도 피해가는 방향으로 정리하려는
또 이상한 습관이 나올 때가 있다.
그러니까 쉽게 쓸 수 있어야 한다.
어렵게 쓰려고 하는 습관이 나오게 되면 문서를 검토하는 과정에서도
단어 하나 하나에 집중할 수 밖에 없어서 몇 번을 수정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단어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제고함에 따라’로 쓰지 않으면 혼나는 회사에 있지 않는 이상,
(당신 혹시 기자..인가?)
쉽게 쓰는 버릇을 들이는 게 좋지 않을까?
어렵게 쓰는 버릇이 드는 게 희한하게 말버릇으로까지
전염되지는 않아서 말과 글이 따로 논다.
그래서 내가 쓴 보고서를 내가 발표하는데도
버벅거리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이다.
생각을 먼저 정리하고 문서를 작성하자.
앞서 백지에서 시작해야 한다고도 했고, 백지에 그리는 과정에서
생각이 정리가 된다고도 했는데 백지에서 시작하라고 했더니
화면에 백지를 띄워놓고 멍하게 있는 사람이 있다.
멍 때리면 안된다. ㅡㅡ;;
보고서를 쓰는 게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어떤 순서로 이야기할 것인지 정해져야 한다.
PC 앞에 있다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무턱대고 써보자.
그리고 그게 다 정리가 되면 그 때 문서 작성을 하자.
이 경우 시간이 마치 두 배가 걸릴거라고 생각될 수 있는데,
우리는 의외로 멍때리며 보내는 시간이 많다.
(그리고 그건 다 야근이다…)
내가 하는 순서는 이렇다.
1. 생각나는 것부터 적어 본다.
생각으로는 할 말이 분명하고,
그래서 작업 시간이 얼마 안 걸릴거라고 생각되기도 하는데
막상 적어보면 몇 자 안된다.
몇 자 안되거나 다음에 할 말이 없거나, 아 이게 아니네 라는 생각이 든다.
우선 내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어떤 걸 모르고 있는지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기본적으로 나를 믿지 말자.
2. 더 이상 생각이 안나면 애쓰지 말자.
애쓰지 말자는 얘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거나(환기), 미친듯이 자료를 찾아보거나(노력)
휴대폰의 각종 놀거리를 즐기거나(도피) 등등이다.
물론 내 머릿속에 자료가 없어서라면 자료를 찾아봐야 하고
흐름이 안 잡혀서라면 환기를 해야 한다.
그리고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다면 도피를 하는 것도 괜찮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계속 놓치지 말고 있어야 하는게 있다.
“생각”이다.
거리를 돌아다니거나 집에서 ‘기묘한 이야기’를 보거나
환기든 도피를 하다가도 어느 정도 생각은 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생각이 났을 때 메모를 꼭 해야 한다.
나중에 메모가 쌓여서 줄기가 되고 스토리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나는 그래서 휴대폰을 항상 가까이 두는 편이다.
3.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모아지면 ‘흐름’을 잡는다.
흐름, 스토리라고 많이 얘기하는데
만약 파워포인트를 활용한 보고서라면 백지로 놓고
맨 위 타이틀 자리에 한 줄씩을 적어 본다. 가급적이면 구어체로 적어 본다.
구어체로 적는 이유는 정말 스토리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마치 PT를 한다고 생각하고 그 페이지에서 할 말 한 마디만 적어보자.
이때 현황, 경향, 내용, 비교 분석 등 해석이 아닌 목차에 가까운 얘기만 적는다면
흐름을 잡기 어렵다.
그 페이지에서 해야 할 이야기 하나만 꼽으라면 어떤 이야기를 넣을 것인가.
그 페이지 자체로보다 앞 뒤 내용을 이어주는 정도의 장치라면,
‘브릿지 페이지’ 정도로 적어도 괜찮다.
이 과정에서 초기 메모장으로 구분한 내용들이 실제로는 합쳐서 한 장으로 되는지,
혹은 내용이 많아서 몇 페이지로 나눠야 하는지 등 스스로 구분할 수 있게 된다.
4. 흐름이 잡히면, (조금 건너뛴 이야기지만) 무엇을 버릴 것인지 정해야 한다.
힘겹게 찾기도 했고 그 자료 때문에 내 생각이 구체화되기도 했지만,
내 자료는 한 쪽으로 쏠려 있을 수도 있다.
너무 괜찮다고 생각되더라도 어느 정도 취사 선택을 해야 한다.
자칫 그 부분 때문에 전체적인 밸런스가 안 맞을 수도 있다.
보고서를 쓰기 위한 몇 가지 방법들을 얘기했지만,
실제 우리도, 그리고 나도 정작 보고서를 잘 쓰는 방법은 모른다.
그럼에도 노력하는 것은 위에 몇 가지 안 되는, 노력들을
매번, 정말 매번 하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설명일 수도 있고, 설득일 수도 있다.
그런데 데이터는 설명인 경우보다 설득인 경우가 훨씬 많다.
그래서 보고서가 중요하다.
좀 더 면밀히, 치밀하게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준비해야 한다.
그렇게 해도 늘 패배가 상주하는 곳이 마케팅, 데이터업계다.
모쪼록 화이팅합시다~